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류큐 왕국 (문단 편집) === 류큐 처분과 멸망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rt.jcc-okinawa.net/geiontei6.jpg|width=100%]]}}} || || 류큐 최후의 왕 쇼타이(尚泰)를 묘사한 그림. 오른쪽 왕자는 차남 쇼인(尚寅). || [[메이지 유신]]이 이뤄져 폐번치현 등으로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일본 신정부는 [[1872년]] [[류큐 번|류큐를 번으로 강등]]하고 '유구국 중산왕' [[쇼타이|쇼 타이]](尚泰·상태)를 '[[류큐 번|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만듦으로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확실히 선언했다. 이것을 '제1차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 이전까지 유구국(琉球國)이라는 이름은 외국의 이름이었고 발음을 전부 음독(音讀)으로 읽어서 류큐코쿠(りゅうきゅうこく,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こく)라고 읽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유구국(琉球國)을 '류큐 번' 일대에 설치된 일본 국내의 [[쿠니]](國)처럼 간주하게 되었다. 쿠니는 고대에 [[율령제]]가 도입될 때 일본 전국에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당시에는 형식화된 행정구역이었다(실질 행정구역은 '번'이었는데, 본토는 폐번치현을 실시한 뒤 번 대신 '현'으로 대체). 이때부터 유구국(琉球國)은 이전처럼 '류큐코쿠'로 읽지 않고, 마지막 부분은 훈독(訓讀)으로 바꿔서 '류큐노쿠니(りゅうきゅうのくに,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のくに)'라고 부르기도 했다. 율령제에 따라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의 국(國)들은 국(國) 부분을 대개 '~노 쿠니(~のくに)'라고 읽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류큐노쿠니라는 쿠니를 설치했다고 명시한 적이 없고,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례를 유추하여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쿠니를 사용하는 일이 사실상 없어지고 새로운 행정구역에 적응해서 큰 의미는 없다. 쇼 타이는 제1차 류큐 처분에 반발하여 청나라에 계속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왔다. 그렁데 일본의 관점에서는 류큐는 일개 번에 불과하니 류큐의 조공 무역이 '밀무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대만 섬]]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 [[1874년]] [[대만 섬]]에 출병하였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영토인 대만섬에 일본군이 상륙하였으니 반발하긴 했으나 류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로써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합병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을 끝냈다. 그 사이 류큐 왕국은 청나라 조정에 SOS를 쳤다. [[1879년]],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번을 없애고 [[가고시마]] 현에 잠시 편입시켰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쇼 타이 왕을 [[도쿄]]에 압송하였다. 이를 '제2차 류큐 처분'이라 부른다. 쇼 타이는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1429년 오키나와섬 통일 이래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당시 세계여행 중이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해양력이 강화되어 향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으로 판단''', 즉시 청나라로 가서 조정 내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일본의 류큐 병합을 막으라고 조언했으나 정작 이홍장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랜트가 계속 설득하자 이홍장은 "정 그렇다면 당신이 한번 일본과의 교섭을 주선해 보시구려"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반대로 일본은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나선 것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아직 국력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중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랜트가 주선한 청일 간 교섭 과정에서 다음 제안이 있었다. * 류큐 3분안(그랜트의 중재안) 류큐를 셋으로 쪼개서 서남부의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는 청이 가져 가고, 동쪽의 아마미 군도는 일본령으로 둔 다음에(어차피 아마미 군도는 이미 일본이 실질적으로 통치해 온 지 오래였다), 중부의 오키나와 본섬은 류큐 왕국을 부활시켜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간 공동 관리하에 두자는 제안이었다. * 류큐 2분안([[이토 히로부미]]의 제안) 류큐를 둘로 쪼개서 서남부는 청이, 나머지는 일본에게 귀속시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3분안은 일본이 발전된 도쿄 생활에 만족한 쇼타이 왕이 낙후된 오키나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실현이 불가능했다. 다만 이전 쇼타이 왕의 행보를 보면 진짜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확률이 높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오키나와 군도는 그대로 일본 영토로 확정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가 해양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세한 내용은 이 [[http://www.dailian.co.kr/news/view/243331|기고문]]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일제 패배 후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중국의 속령으로 간주하고 [[장제스]]에게 중화민국으로의 할양을 타진하였는데 장제스가 이를 사절했다. 류큐가 청일 간에 분할되었거나 중화민국에 할양되었더라면 오키나와의 현 정세는 [[센가쿠 열도|훨씬]] [[양안관계|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일본의 류큐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으로 내정 간섭을 하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을 방문하여 강화도 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에 의지했던 류큐가 한 방에 일본에 넘어가자 [[베트남]]이나 [[조선]]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류큐는 [[일제강점기]]에 법적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內地), 즉 본토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내지라는 단어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어휘로 쓰이고 있다. 류큐의 강제 병합은 주변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유운동(일본 유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 이 운동은 결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났다.]을 주도한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반패주)는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류큐의 망국사를 언급하며 독립이 왜 중요한가를 자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류큐가 강제 병합되어 일본의 한 현으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는 [[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 문서를 참조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